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키예프 루스 (문단 편집) === 초기 === [youtube(HY8Lb1w1JzY)] 이후 올레그는 키예프 인근의 여러 [[동슬라브]]족들을 공격해 영토를 빠르게 확장했다. 키예프 루스는 910년에 [[카스피해]]를 통해 [[이란]] 북부 마잔다란 지역을 약탈하기도 했고, [[흑해]]를 통해 [[동로마 제국]]에도 [[제8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직접 원정을 가기도 했다.]] 올레그의 뒤를 이은 자는 제1대 대공 류리크의 아들로 알려진 이고리 류리코비치였다.[* 류리크가 죽었을 땐 이고리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친척인 올레그가 중간에 나라를 통치했고 올레그 사후 원래 계승 구도로 돌아온 셈이었다.] 941~944년에 다시 동로마 원정에 나섰으나, 945년 제국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오는 길에 키예프 공국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반감을 품은 드레블랴네족에게 살해당했다. 이고리 류리코비치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스뱌토슬라프]]는 너무 어렸기에 이고리의 아내 [[키예프의 올가|올가 대공비]]가 [[섭정]]하였다. 이 시기 드레블랴네족에게 응징을 가하여 세력을 크게 약화시켰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세례를 받아 루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군주가 되었다. 아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성장한 뒤 965년부터 군사활동에 나서서 볼가 불가르를 복속시켜 볼가 강 일대의 무역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하자르]]를 공격하여 수도 이틸을 함락시켰다. 원초 연대기에 따르면 슬라브 부족들은 9세기 바랑고이족들이 남하하기 이전까지 하자르 칸국에 공물을 바치던 상황이었다. 루스인이 남하하여 하자르 칸국은 점차 슬라브 부족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하다가, 10세기에 키예프 루스에게 침공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과거 하자르 칸국에게 공물을 바치던 슬라브 부족 상당수가 루스인들에게 투항한 것을 계기로 키예프 루스는 점차 슬라브화되었다. 이후 스뱌토슬라프는 [[스뱌토슬라프 전쟁]]을 일으켜 발칸 반도의 강국 [[불가리아 제1제국]]을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는 등 그 강력한 군사력을 입증했다.[* 유목 민족이었던 [[쿠만|폴로베츠]]인들의 어머니들은 그의 이름으로 겁을 주곤 했다. 나폴레옹 사례와 비슷하다.] 하지만 결국 스뱌토슬라프는 [[동로마 제국]]도 공격하다가 [[요안니스 1세]]에게 패배하고 돌아오던 중 유목 민족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인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두개골은 술잔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스뱌토슬라프의 최후는 비참했으나 패배하기 이전까지는 군사적으로 뛰어났다. [[동로마 제국]]은 키예프 공국 병사들의 활약상을 보고는 [[바랑인 친위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정확히는 밑에 나오는 블라디미르 1세가 형 야로폴크와의 내전에서 루스인 용병들을 고용해 써먹었다가 내전이 끝나자, 할 일이 없어지고, 유지비도 많이 들게 되었다. 그때 마침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얼씨구나 하고 보낸 루스인 용병 6천 명이 시초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활약도 활약이지만 이들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해서 고용하였다. 실제로 바랑인 친위대는 외지인이어서 기댈 사람이라곤 오직 황제밖에 없었기에 이전의 로마 제국 근위대와 달리 황제를 갈아치우는 짓을 하지 않아서 충성심을 입증하였다. 대신 황제가 폐위되면 바로 충성의 대상을 새 황제로 바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